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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사/생각거리..

이제 방문하거나 관광을 하더라도 굳이 우수리스크 지역은 제정 러시아 때부터 우리 민족이 이주해서 살아가던 곳 이었다.소비에트 시대에 전쟁에 대한 준비로 1937년도에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 당하기 전에는 18만 여명 이상의 고려인이 살고 있었다고 한다.다시 러시아로 전환되어서 우수리스크로 재이주를 하게 되는 1990년 중반에는 한국어 를 잊지 않고,또 잊지 않으려는 고려인들이 어느 정도 있었다. 그때에 이미 이주 3세대,4세대의 고려인들이었다.그들은 중앙아시아에서 대가족을 형성하 며 살며,또한 자신들의 문화를 잊지 않으려 노력하는 사람들이 있었기에 가 능했다고 본다.그러나 그 후 다시 한 세대 이상이 지나 4세대 5세대에서 6세 대가 되어 살고 있는 지금은 한국어에 대한 이미지나 교육열이 예전과 많이 달라졌다고 할 수 있다. 예전에는 집안에.. 더보기
회사들이 속속 회 사를 접게 되면서 997년도에 우수리스크 사범대학의 졸업생 18명 중 3명만이 현대 호텔과 교 육원에 취직을 하였다.그러나 현대 호텔에는 영어가 우선이고 차선이 한국어 로 채용된 것이었다 그 후 한국의 IMF를 겪으면서 한국계 회사들이 속속 회 사를 접게 되면서한국어 통역을 필요로 하는 회사들이 없어지게 되었다.그 러면서 자연히 통역이 필요 없게 된다. 만약 통역이 필요하면 영어를 하는 통 역을 채용하게 된다.그러다 보니 학교에 들어와서 한국어를 배우려고 하는 학생이 줄어들게 되었다.특히 사범대학은 선생을 만들어 내는 학교이다.그러 나 한국어에 대한 수요가 줄어들다 보니 선생에 대한 선망도 없어지게 되는 것이었다. 우수리스크 사범대학의 한국어학과는 1992년도에 학과가 개설이 되었는데 5 년제 복수 전공이었다.한국어가 주.. 더보기
한국어를 배워서 사회에 나가게 된다. 옛 소련에서는 러시아어만이 공용어이자 국어였다.다른 민족들에게도 마찬 가지였다.그리고 사회 진출과 자신의 분야에서 인정을 받기 위한 필수적인 언어였다. 그러나 소련이 붕괴되고 러시아 연방을 제외하고는 각 공화국이 된 것처럼 러시아어도 위상이 달라졌다. 구소련의 공화국들이었던 국가들은 자신 들의 언어를 국어로 지정하게 된 것이다.그래서 러시아어는 계속 사용되고 있지만 그 위상은 현저히 낮아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고려인들이 자신의 언 어로 러시아어를 사용하는 것이 타당한가를 물어보는 것은 합당하지 않은 질 문일 것이다. 그들은 중앙아시아에서나 러시아로 다시 이주해 오거나 집단 군 락을 이루고 살지 않았다. 몇몇 가정이 서로 멀지 않은 곳에 살기는 하지만 완전한 부락이나,마을을 형성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렇.. 더보기
러시아 안에서는 러 시아말을 사용하려고 했고 언어의 위상은 민족의 위상과 가치를 나타내는 특히 다민족 국가인 러시아 에서의 언어의 위상은 단일 언어 국가와는 다른 의미를 가진다. 동시에 절대 다수의 민족들에게 있어서는 모국어에 대한 이해나 현실은 약간의 변화는 있 지만,매우 안정적으로 인식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소련의 재편은 러시아 연방내의 민족들 간에 다양한 문제를 일으켰으며,그 문제들 중에는 역시 언 어문제가 포함되어 있다. 1880년대 제정 러시아와 조선과는 여러 면에서 좋 은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1860년대 먼저 수교를 하자고 한 나라도 러시아였 고,러시아에 이주한 조선 사람들을 받아들여 준 것도 러시아였다. 그러나 소 비에트 정권이 되는 볼쉐비키 혁명 이후 1937년 강제 이주사건, 1950년 한반 도의 6·25 전쟁을 치르고 분단.. 더보기
어느 정도 교육의 기반을 잡았다고도 그것은 러시아에서의 한국에 관련된 공연이나 행사가 없었다고도 할 수 있고, 그들의 성향이 꼭 한국의 유행에,노래에,춤에 열광하는 것도 아니라는 뜻이 다. 한때 ‘한국으로 가자’하는 열풍이 불었을 때도 있었다.그러나 그것도 잠 시,많은 러시아인들이 한국에서의 일을 그만두고 본국으로 가거나,아예 다시가지 않으려고 한다.한국에서의 꿈이 예상한 만큼의 성과를 주지 못했다는 것이었다.또 러시아 안에서 한국어를 공부해서 갈 수 있는 직장이 많지 않다 는 것도 하나의 이유가 된다. 현재 러시아의 대학에서는 어느 정도 교육의 기반을 잡았다고도 할 수 있 다.그러나 초 중등 교육에는 전혀 진전이 없다.여전히 한국어가 보급될 여지 가 많지 않아 보인다. 우수리스크의 3군데의 중등학교에서 교육되었던 한국어 수업이 이제는 한.. 더보기
열심히 노력하지 않아도 되는 악순환의 그 이유로는 한국어를 가르치는 학교가 그만큼 없다는 것이기도 하다.실제 로는 일 년에 한명도 교사가 되는 경우도 드물다. 현재 대학과 중등학교에서의 교사는 우수리스크 사범대학 한국어과 졸업생들 중 ,1회 한 명,3회 3명, 5회 1명,10회 한 명이 대학에서 교수요원으로 있고,4회 졸업생 2명과 5회 졸 업생 두 명이 일반학교와 고려문화센터에서 교사로 일하고 있는 것이 전부이다. 제도적으로 초등교육에서 한국어의 기초를 다지고 점차 학년이 올라가면서 수준도 높아지고 대학에서는 전공자의 학업이 학문으로서의 성취가 있어야 함 에도 불구하고 대학에서 처음으로 한국어를 접하게 되는 학생들이 많다. 그러 다 보니 교육의 질이 낮아지고 학생들의 수준이 높아지지 않고 있다.그러니 교사가 열심히 노력하지 않아도 되는 악.. 더보기
모든 과목들을 다 가르치지 못하고 블라디보스톡에 한국 교육원이 있어서 그 안에서 한국어 강의가 이뤄지고 있다. 또 초·중등학교에 서 한국어를 가르치는 곳은 블라디보스톡에 5개 학교,아르춈에 1개 학교,아 르세네프에 1개 학교,우수리스크에 3개 학교,나호드카에 1개 학교가 있다. 우수리스크 고려인 센터에서 교육을 하고 있다.그리고 한국 선교사들이 세운 교회에서도 선교 차원에서의 한국어 교육이 이루어지고 있다. 그 한국어교실 은 숫자가 정확히 파악되지 않고 있다. 교과목도 학교마다 다르다.한국학대학은 말 그대로 한국에 대한 과목들,한 국의 문화,경제,역사,정치에 대해 가르치는 시간이 많고,사범대학에서는 문법,회화,실습,어휘론,문장론,언어학,교수법 등을 가르쳤다. 지금은 한국인 교수가 없어서 모든 과목들을 다 가르치지는 못하고 있다.그리고 일.. 더보기
교수들의 노력에 의해 이루어 낸 조선어문학 극동지역에서는 1975년 극동대학에서 조선학 관련 강좌의 개설을 하였고 이 대학의 동양학부에 조선어문학 및 조선사학 학과를 설립하기로 하였다.이렇 게 시작된 조선학 강좌에는 1975년부터 학생들이 입학하였으며 그해 레닌그라 드 국립대학을 졸업하고 온 카플란이 최초의 교수가 되었다. 그 후 조선학 연구에 빼어난 업적을 세운 갈키나 교수가 있다.그는 조선 문학과 민속학을강의 하였다.1980년대 교수들의 노력에 의해 이루어 낸 조선어문학 강좌는 추후 한국과의 관계를 위해 노력을 하였다.특히 한국과의 국교를 수립하면서 교재 연구 및 교수법서적의 부족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고,한국의 여러 대 학과의 교류도 시작하였다. 그리고 1994년에는 한국학 강좌가 한국학 학부로 변모하게 된다.그리고 1995년 동양학부 소속.. 더보기
한살림 감귤즙을 사서 마셔봤다 한살림 감귤즙을 처음 사서 마셔 봤다한살림 조합원이 된 지는 꽤 되었지만지금껏 주스 종류는 따로 사 본 적이 없었다 그러다가 지인이 주스도 괜찮다고 이야길 해줘서. 왜 지금껏 다른 것은 사 먹으면서 음료는 생각 못 했지?유기농 우유, 두유도 사 먹어 보았는데주스는 생각을 안 하고 있었던 거다. 목요일 주문하고 월요일 오전에 도착~ 감귤즙 620ml 가격은 3500원~그러니까 시중 수퍼에 파는 오렌지나 귤주스들 보다는가격이 좀 더 비싸다.그러나 그 가격이 당연한 것이, 정제수 한 방울 안 들어간 착즙이라 그렇다 당연히 설탕이나 액상과당도 들어가지 않았다.농축과즙도 아니다.그냥 착즙이다. 아래는 한살림 홈피에서 가져온 설명. - 제주에서 무농약 이상으로 생산한 감귤로 만들었습니다. - 질 좋은 귤을 잘 선별.. 더보기
만주 어문학 부에서 선택과목이었던 조선어 우수리스크 대학을 졸업 한 후 석사 학위를 위해 연해주 지역을 떠나 상트 뻬떼르부르그로 가거나 모스크바로 공부하러간 학생들이 있다.한국으로 유학 을 온 학생들도 있다.하지만 그들 중 한 명도 우수리스크로 돌아가지 않았다. 다들 유학하러 간 곳이 좋아서 그곳에 머물게 되었다고 한다.그것은 러시아 연해주의 생활환경이 그만큼 좋지 않았다는 현실이기도 했다. 현재 러시아의 한국어 학과가 개설되어 있는 학교에서 한국인 교수의 비율 이 많은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학교마다,또 시간이 지남에 따라 상황이 바뀌기 때문에 그 현황은 매년 새롭게 확인해 봐야할 사항이다. 2)교육기관제정 러시아 때에 3개의 한국학 센터들이 존재했었다.첫 번째로는 당시의 수도 상트 페테르부르그였다1897년도에 서유럽에서는 처음으로 상트 페테르..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