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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사/생각거리..

민족학교도 생기고 고려인 사범학교도

당시에 함경도 지방에 기근이 들기도 하였고,국경이 허술한 시대에 러시 아 땅을 오가며 농사짓는 사람들이 꽤 많았던 것으로 추정된다.그들이 러시 아의 신분을 얻기로 하면서 최초의 이민자가 되는 것이다.그 당시에 그것을 기록한 문서에 민족을 구분하는 곳에 고려인,까레이스키라고 적었다고 한다.


그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다.그 당시의 언어는 당시 조선의 언어와 다르지 않았다.그리고 연해주의 우수리스크와 블라디보스톡에 많은 수의 고려인들이 모여서 부락을 형성하며 살았다.그들이 집단으로 살면서 그들만의 언어를 지 키면서 살았다.그래서 몇 세대 동안에는 그들의 언어가 보존 되었다고 할 수 있다.그 당시 러시아에 들어와 살게 된 사람들은 교육을 받지 못한 일반계층 사람들이었다.그리고 러시아에 동화되어 살아가야하기에 조선어가 중요하지 않았다.또한 당시의 사람들은 교육에 대해 중요히 여기지 않았다.오히려 러 시아에 동화되어 사는 것이 더 중요했다.



러시아에 이주해 온 조선인들은 조건에 있는 다는 농민들 보다 더 나은 생 활 조건을 갖게 되었다.러시아 정부,혹은 러시아 극동 당국은 러시아어로만 쓰고 읽게 하지는 않았다.조선인들은 자녀를 위해 여러 개의 학교를 세웠고 교육에 대한 태도는 적극적이었다. 


그러나 조선이 일제에 치하에 들어가면서 독립을 외치고 준비하는 독립 운 동가들과 많은 사람들이 1910년 이후 일제를 피해 만주로 연해주로 이주해오 기 시작한다.그러면서 교육에 대한 필요성이 대두되었다.그래서 민족학교도 생기고 고려인 사범학교도 설립하였다.그러나 그것도 얼마 가지 못했다.그것 이 바로 1937년도의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였다.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 당 하면서 언어의 고립현상이 나타난다.당시 많은 사람들이 함경도 지방에서 이 주한 탓에 아직 많은 말투가 함경도 말투가 남아있다.거기에 초기 이주시대 에 생활하면서 러시아어의 영향도 받게 되면서 독특한 형태의 언어로 남게 된 다.또한 중앙아시아에서도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으로 나눠지면서 약간 의 차이를 보이기도 한다.